보당(保堂) 송덕비(頌德碑)는 윤창식 동화약품 5대 사장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5대 사장 보당 윤창식 송덕비(頌德碑)
보당 윤창식공(5대 사장님)의 비문
보당 윤창식공의 본관은 파평이니 고려개국벽상공신 신달공의 삼십오세손이요 조선조세종대왕의 부마이신 영천부원군충경공의 십팔세손이며 충청감사와 좌찬성을 지내신 득설공의 십일세손으로 선군자이신 태진공과 그 부인 나주임씨 사이에
서 1890년 2월 13일 탄생하시어 백부이신 태준공에게 출계하셨으니 두부인 해주 오씨와 경주 김씨에게서 화열, 중열, 광열의 3남과 선열부는 채기원 덕열부는 강일구 옥렬부는 김윤희의 3녀를 두시고 1963년 2월 8일 74세로 서거하시다.
전부인 해주오씨는 수영공의 따님으로 1892년 6월 13일에 탄생하시어 1919년 6월 6일 서거하셨으며 후부인 경주김씨는 1902년 1월 28일 탄생하시어 1964년 8월 27일에 서거하시니 두부인이 낳으신 3남3녀의 화목함은 근린의 귀감이 되다. 공은 1908년까지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시고 1912년에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 현재의 보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하셨으며 1914년까지 서울보성전문학교 현재의 고려대학교에서 공부하셨다.
학교를 나오신 뒤에는 일정치하에 이 겨레의 자주경제의 발전을 위해 국산애용을장려할 목적으로 조선산직장려계를 인촌 김성수씨와 함께 세워서 같이 일하셨으며 또 조선독립운동의 국내 기간단체였던 신간회의 간부로서 조국광복운동에 힘쓰시는 한편 1937년에는 민족보건산업의 육성을 위해 당시의 동화약방을 맡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개칭해 세우고 현대기업으로 발전시키셨다.
1945년의 조국해방 뒤에는 이승만 박사의 영도하에 대한독립 촉성국민회의 부위원장으로 되셨으며 또한 서울시의원과 숙명여자중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과 자선사업단체인 보인회의 창립자등의 여러 직책을 맡아 갱생조국의 민생의 흥융에 몸을 받치어 오셨다.
무릇 한사람이 한 자아로서, 가정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또 역사인으로서, 영원히 떳떳한 전인으로서 살다 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의 보당 윤창식공은 넉넉히 여기 해당되는 분으로 나는 여긴다.
공의 인격은 온고지신의 깊은 교양과 하늘에 닿는 박애와 늘 면밀하셨던 대승의지혜로서 일관하셨으니 집안에서는 선대의 효도와 후대에 애육을 다하시어 온후한 가풍을 이루어서 공문중의 중시조라는 일컬음을 받으셨고 또한 사회인으로서는 조국이 다난하던 일정치하와 광복이후를 한결같이 애국애족 정신으로 정치와 경제와 국민보건과 자선사업등의 다방면에 걸쳐서 전력을 다해 영도해 헌신하셨다.
공은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늘 먼저 남의 의견을 중시함으로써 사사로움에흐르지 않으셨고 일을 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어떤 실패에도 실망치 않는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하셨으며, 재앙도 거리낌 없이 맞이해 선도하는 바다 같은 포용력으로 대하셨고, 항상 모든 것을 갖추고 사는 유비무한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셨으니, 가정과 민족의 단합과 번영을 위해서는 늘 이렇게 넉넉하시었지만,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가혹하시어 그 교통 왕래에는 당시의 최저 운임의 그 전차라는 것을 상용하실 만큼 검소키만 하실 뿐이었다.
이렇던 공의 후계자들이 감동하여 못잊어함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마라, 동화는 동화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서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
이 말씀은 공이 임종때에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의 임원들과 자녀질 들에게 유언으로 남기신 교훈이라 하거니와 이것은 또한 공께서 이 나라의 모든 후생들에게주신 충심의 교훈이기도하다.
끝으로 여기 아울러 공의 전후의 양위부인 이셨던 해주오씨와 경주김씨의 출천의 효열과 내조의 큰 공덕을 추모하고 또 찬양하노라.
1982년 2월 19일
달성후인 미당거사 서정주 짓고
안동후인 일중거사 김충현 쓰다.